2320년, 「어스(Us)」는 한때 ‘지구’ 라 불렸던 행성을 대신하는 이름이 되었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인류는 눈부신 과학의 진보에 도취되어 있었다. 모든 질병이 정복되었고, 인공지능은 인간의 일상을 정교하게 설계했으며, 도시는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 번영의 대가는, 인류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말았다.
지각의 균열로 시작된 지진은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기후’ 라는 개념은 결국 사라졌다. 대지 위에서는 독성 가스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은 해마다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우주를 넘나들던 탐사선도, 꿈을 현실처럼 구현해내던 가상 현실도, 초음속으로 질주하던 자동차도, 무너져가는 지구의 기반 위에서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진보의 끝자락에서 인류가 기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바다였다.
역설적이게도, 끝없이 확장된 오염 속에서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해역에서는 독성의 농도가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드문드문 보고되기 시작했다. 대지는 등을 돌렸지만, 바다는 마지막까지 품을 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붕괴는 아시아에서 시작되어, 유럽을 지나, 23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모든 국가가 멸망했다. 살아남은 이는 인류 전체의 단 1%에 불과했기에, 언어는 점차 그 의미를 잃어갔다. 그리하여 영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가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이러한 절망의 시대에, 유일하게 조직을 유지하고 있던 기업 「슈뢰딩거」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했다. 그들이 오랜 시간 비밀리에 설계해온 ‘이상적 도피처’, 「헤븐즈 레일」의 공개였다.「헤븐즈 레일」 은 다섯 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선박으로, 각 층은 하나의 도시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방대했다. 각각의 층은 독립적인 생태계와 도시 기능을 갖추고 있었고, 그 규모는 지상에 존재했던 어떤 대도시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철과 인공지능, 그리고 마지막 남은 인간의 기술력이 집약되어 완성된 이 구조물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인류의 유산’ 이었다. 「헤븐즈 레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였고, 동시에 인류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생존의 땅이었다. 오염도가 비교적 낮은 바다 위를 유영하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안전’이라는 개념을 가까스로 흉내 낼 수 있는, 유일한 이상향.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그렇게, 철과 인공지능으로 이루어진 궤도 위에 떠오르게 되었다.
지구에 마지막까지 존재했던 기업, 「슈뢰딩거」가 설계하고 제작한 인류 최후의 거주지. 그것은 인류가 지구 위에서 마지막으로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 바로 ‘헤븐즈 레일’ 이다.
이 거대한 선박은 현재 남극의 바다 위를 천천히 유영하며 떠다닌다. 목적지 없는 항해. 다만 오염 감지 레이더가 비교적 청정한 지역을 찾아내면, 헤븐즈 레일은 그 방향을 향해 아주 느릿하게 나아갈 뿐이다. 그 속도는 너무나 느려, 배 위에 살아가는 「선원」 들조차 자신들이 배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갈 정도다.
거대한 선박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헤븐즈 레일의 일상은 지상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각기 다른 가족이 존재하고, 각자 공동체에 필요한 일을 하며 살아간다. 선원들이란 결국, 이 선박의 부품과도 같은 존재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헤븐즈 레일 안에서는, 한때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다시 평화를 누릴 수 있으니까.
「헤븐즈 레일」이 세상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 2190년경의 일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상황이 이토록 절망적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 믿는 이는 드물었다. 그래서 이 거대한 선박의 계획은 조롱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 와중에도 「슈뢰딩거」는 멈추지 않았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는 동안, 헤븐즈 레일은 세간의 조롱을 견디며 천천히 조립되었고, 2228년──마침내 인류의 대부분이 자신의 종말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사라져갈 즈음, 거대한 선체가 바다 위로 떠올랐다.
이 배에 오를 수 있었던 조건은 단 두 가지. 하나는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는 것, 다른 하나는 헤븐즈 레일 제작에 직접 참여해 기여한 자. 그 어느 것도 충족하지 못한 이들은, 현재──2320년── 이 땅 위에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 한때 ‘푸른 행성’ 이라 불리던 별 위에 여전히 존재하는 인간의 수는 단 3,000여명. 그들 모두가 헤븐즈 레일의 「선원」이다. 그 밖의 인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Timeline
22세기 후반: 대다수의 국가에서 지진, 해일 등 대규모 재해가 발생함. UN 은 더이상 국가의 개념이 필요 없을 것이라 보도함.
2190년: 「슈뢰딩거」가 「헤븐즈 레일」의 제작을 발표함.
23세기 초반: 인류의 수가 10% 이하로 감소하고, 모든 국가가 행정 마비를 선언함.
2228년: 「헤븐즈 레일」의 항해가 시작됨.
2320년: 현재. 「헤븐즈 레일」에 탑승한 선원 외 생존하여 있는 인류 전무.
▸ Life on Heaven
헤븐즈 레일의 삶은 기묘하게도, 과거 인간 사회를 정교하게 모방하고 있다. 사회의 계층이 명백히 나뉘며, 그 부분은 선박 내부에 철저하게 시각화되어 있다.
가장 많은 부를 지닌 자일수록 깊은 심해에 가까운 하층 구역에서 살아간다. 그곳은 오염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안정되고 보호받는 구역이다.
반면, 어떠한 자산도 기여도도 없는 이들은 선박 최상층에 배정된다. 바로, 오염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그들과 유독성 대기를 가르는 것은 단 하나의 얇은 유리 돔. 그 유리 아래에서 그들은 숨을 쉰다. 아니, 숨을 ‘버틴다’ 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헤븐즈 레일의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살아간다. 사회 유지에 필요한 노동, 기술, 감시, 인력. 생존을 위해 설계된 역할 속에서 인간은 기능 단위로 분류되고 배치된다.
이곳에서도 아이가 태어나고, 가족이 형성된다. 그러나 그것은 혈육의 서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체계적 번식에 가깝다. 죽음은 조용히 처리된다. 숨을 거둔 이는 잿더미로 환원되어, 바다로 흘려보내진다.
이곳은 정교하게 맞물린 하나의 거대한 기계다. 사람이라는 부품들이 주기적으로 교체되고 사용되며, 소모되는 시스템. 그것이 바로 헤븐즈 레일에 거주하는 사람들, 즉 「선원」 들의 삶이다.
헤븐즈 레일은 총 6개의 층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0층(존 제로)을 제외한 나머지 층은 바다 속에 잠겨있다. 거대한 크루즈, 함선과 비슷한 형태로 각 층별로 거주자의 계급과 환경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다른 층으로 오가기 위해서는 승인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며, 존 제로의 선원은 다른 층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0층 | 존 제로 ‧ Zone Zero
버려진 선원들의 땅. 얇은 유리 돔으로 덮인 갑판은 금이 가 언제 부서질지 모를 불안함을 자아낸다. 헤븐즈 레일에서 쓸모없다 판단된 선원들이 머무는 만큼, 거리는 지독하고 망가져 있으며 살아남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혜택을 누릴 수 없다. 필요 없는 것들이 버려지는 장소에는 때때로 다른 층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 있기도 하다. 가령 낡은 소설책이라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바다 속 사람들은 결코 해수면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1층 | 그라운드 ‧ Ground
수많은 기계들이 가득한 산업 단지. 헤븐즈레일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공장과 필수 시설, 일부 연구실이 존재한다. 기계산업에 최적화된 비오스와 함께 작업하며 해당 층에서 일하는 선원들을 위한 거주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오락과 유흥거리는 거의 없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기술력을 전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라운드 층의 선원들은 헤븐즈 레일을 이루는 자신들의 일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2층 | 하이라이트 ‧ Highlight
가장 많은 선원들이 살고 있는 주거 단지. 일반 선원들의 주택, 상가와 같은 평범한 시설들이 자리하고 있다. 인구 수를 가장 많이 차지하는 만큼 비오스 또한 상당 수 존재한다. 학교, 음식점, 병원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도서관에는 이론과 학업에 관한 서적만이 마련되어 있다. 영화, 소설, 문학 같은 감수성을 자극하는 시설은 전무하다. ‘불필요한 감정 자극 요소’ 따위는 헤븐즈 레일에서 금기시되는 것과 다름 없다. 다만, 선원의 스트레스 관리를 위한 오락 시설은 일부 존재한다.
3층 | 온 헤븐 ‧ On Heaven
부유층의 선원들이 생활하는 층. 헤븐즈 레일을 유지하는 데에 보다 중요한 기술을 가진 선원들이 거주하는 층으로, 하이라이트보다 부유하고 높은 질의 생활을 보장 받는다. 사사롭게는 질 좋은 의류부터 거주 공간, 사치스러운 음식도 향유할 수 있다. 명품이라 불리우는 물건들이 존재하는 백화점과 고급 레스토랑, 술과 담배 또한 구할 수 있다. 온 헤븐의 층의 선원들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유포리아를 꿈꾼다.
4층 | 유포리아 ‧ Euphoria
헤븐즈 레일의 주요 인사들이 거주하는 층.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제외하고 헤븐즈 레일의 핵심이 되는 인원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수는 100명 안팎으로 적은 인원이다. 구 시대의 '귀족' 이라 불리는 선원들이기에 모두가 존경하고 선망하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고급 인력들이 머무는 만큼 그들만의 연구실이나 작업실도 존재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향한 충성심이 가장 강한 층이기도 하다.
5층 | 캣츠 네스트 ‧ Cat's Nest
슈뢰딩거의 고양이 본부로 가장 낮은 층이자 심해와 가깝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임원진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들 외에는 접근이 불가능한 공간이다. 헤븐즈레일이라는 거대한 수상도시를 움직이는 심장, 뇌와 다름 없는 장소이며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슈뢰딩거」는 20세기 초, 인간 문명의 미래를 설계한다는 명목으로 태어난 기업이었다. 과거에는 첨단 과학 기술, 생명공학, 우주 환경 적응 기술 등 인류 생존에 필요한 핵심 기술을 연구하던 초국가적 기업이었다. 그들은 인류 생존에 직결되는 핵심 분야를 연구하며, 국가와 시장의 구분을 초월한 초국가적 실체로 성장해갔다.
겉으로는 극단적 위기에 대비한 미래 시뮬레이션 전문 기업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 이면에서 「슈뢰딩거」는 각국의 통제를 벗어난 폐쇄형 기술 연합체로 진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23세기 중반, 정부 기능이 완전히 붕괴된 세계에서 그들은 인류 생존에 필요한 기반 시설을 스스로 설계하고 운영하는 ‘대체 정부’의 위치에 이르렀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바다 위를 부유하는 인류 최후의 도시── 「헤븐즈 레일」 이다.
헤븐즈 레일의 위, 슈뢰딩거는 독자적인 정부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정부를 「슈뢰딩거의 고양이」 라고 부른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선원 개개인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통제한다. 즉,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내리는 지시는 선원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것이며, 지시에 복종하지 않는 자, 시스템의 판단에 불복하는 자는 반역자로 분류되어 주저 없이 헤븐즈 레일 바깥으로 추방된다── 차가운 바다와 독성의 대기 사이, 단 하나의 숨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곳으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외부인을 채용한 적이 없다.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도 그들은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헤븐즈 레일이 바다 위를 항해한 지 100여년이 되었지만, 그 긴 시간 동안 그 누구도 그 비밀스러운 행정기관의 문을 열고 들어간 적이 없었고, 그곳에서 나오는 자 또한 본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100년 전 처음 이 배에 승선했던 사람들, 그들이 지금도 여전히 정부의 모든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 답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헤븐즈 레일」 에서 질문은 금기시 되어 있다. 진실은 영원히 침묵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일부 선원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헤븐즈 레일 중심부, 일반인의 접근이 철저히 통제된 5층 통제 구역을 향해 다수의 「비오스」── 기계 생명체들이 출입하는 장면을 여러 명이 각각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목격했다는 것이다. 비오스는 원래, 사람의 명령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감정도, 판단력도 갖지 않은 그들은 인간의 연장선, 혹은 도구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목격담에 의하면, 그들은 누군가의 명령 없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들이 서로 통신 없이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고 증언하기도 했다.
헤븐즈 레일의 「0층」── 즉, 대기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 최상단 구역은, 사실상 선박 내부에서 ‘버려진 자들’ 을 수용하기 위해 존재하는 층이다. 이곳은 공식 문서상으로는 ’존 제로(Zone Zero)’라 불리지만, 선원들 사이에서는 ‘쓰레기장’ 이라는 명칭으로 더 자주 회자된다.
「0층」으로 보내지는 자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조건을 갖는다. 이들이 살아 있는 한 ‘죽었다’ 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존재는 더 이상 사회에 유용하지 않다는 판단을 받은 자들이다. 중대한 부상으로 더 이상 노동이 불가능한 자, 정신적 균열로 통제가 어렵다고 간주된 자, 혹은 처음부터 이 시스템이 요구하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던 자들──그들은 아무런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이 층으로 이송된다. 그러한 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역시 존 제로의 주민이 된다.
존 제로의 주민들은 명백히 헤븐즈 레일 사회로부터 분리된 존재다. 그들은 허가 없이는 다른 층으로 내려갈 수 없으며, 의무적으로 공급받는 최소한의 자원으로만 생존을 이어간다. 한정된 식량, 제한된 의료, 노후화된 기계, 그리고 언제 파열될지 모르는 유리 돔 하나만이 그들과 오염된 외부 대기 사이를 가르고 있을 뿐이다.
즉, 극단적으로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사회가 ‘쓸모없다’ 고 판단한 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불필요한 부품들의 망명지가 바로 이 존 제로인 것이다.